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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양·드라크마·탕자의 비유로 보는 하나님의 사랑과 회개, 장재형목사(Olivet University)

장재형목사(Olivet University)는 누가복음 5장 즉,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 이 세 장면은 각각 목장, 집 안, 가정이라는 서로 다른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공간의 차이보다 더 본질적인 공통점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잃어버린 존재를 향해 기꺼이 움직이는 마음"이라는 공통점, 그리고 그 마음이 움직일 때 하늘이 기뻐한다는 역설적 선언이 그것입니다. 장재형목사가 이 본문을 통해 계속 붙잡는 핵심은 결국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감상적 언어가 아니라, 잃어버림을 견디지 못하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며, 그 사랑의 결은 인간의 계산법과 정반대 방향으로 흐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은 단순히 회개를 촉구하는 장이 아니라, 회개가 가능하도록 "돌아갈 집"을 열어 두시는 하나님을 먼저 보여주는 장이 됩니다.

이 장을 여는 분위기는 선명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오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모습을 못마땅해하며 수군거립니다. "왜 저 사람은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먹는가?"라는 질문은 겉으로는 경건을 위한 문제 제기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층위에서는 사랑의 질서를 낯설어하는 인간의 본능을 드러냅니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낯섦'을 신앙의 진단 기준으로 삼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세계가 우리에게도 생경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본문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랑의 궤도에서 조금 비껴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타락 이후 "큰 것, 많은 것, 눈에 띄는 것"에 가치를 두는 쪽으로 기울어졌고, 그래서 무게가 덜해 보이는 한 사람, 한 영혼, 한 번의 눈물, 한 번의 방향 전환을 하찮게 여기려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5장의 하나님은, 대다수가 안전하다는 이유로 소수를 가볍게 통계 처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문제없는 99"를 당연히 여기지 않으시면서 "잃어버린 1"을 위해 길을 나서십니다.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도덕적 교훈이기보다, 인간의 세계를 뒤집는 새로운 질서로 다가옵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 목자는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하나를 찾아 "찾을 때까지" 다닙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단어는 '효율'이 아니라 '끝까지'입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이 비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점이 얼마나 다른지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숫자를 통해 안정감을 얻고, 다수를 통해 성공을 증명하며, 손익계산을 통해 옳고 그름을 정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 속 목자는 손익계산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로 움직입니다. 그 사랑의 언어는 "한 사람의 회개가 하늘을 더 크게 기쁘게 한다"는 선언으로 정점에 이릅니다. 하늘의 기쁨은 규모로 결정되지 않고, 회복으로 결정됩니다. 사랑은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기쁨과 사랑을 동전의 양면처럼 읽습니다. 사랑이 움직이면 기쁨이 발생하고, 기쁨은 다시 사랑을 확장시키며, 그 순환이 하늘의 언어가 됩니다.

두 번째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는 더욱 일상적이고 더 노골적으로 "비합리적"입니다. 한 여인이 열 개 중 하나를 잃고,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낼 때까지 부지런히 찾습니다. 여기서 드라크마는 당시의 생활경제에서 가벼운 동전이 아니었습니다. 성서·고대 화폐 설명에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 수준으로 언급되곤 하며, 누가는 이 액수의 상실이 가난한 집안에 결코 사소하지 않았음을 독자가 체감하도록 배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더 낯설게 만드는 지점은 "찾았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과시하는 방식"입니다. 여인은 동전을 찾자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아 함께 즐기자고 말합니다. 동전 하나 찾았다고 잔치를 벌인다니,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과장이고 낭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과장'이 복음의 문법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합리성 안에 얌전히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진폭은 우리의 타산을 뚫고 넘어오며,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순간의 기쁨은 잃어버린 시간을 한 번에 보상하는 듯 폭발합니다. 그 기쁨이야말로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 품으시는 마음의 크기를 비유적으로 체감시키는 장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비유, 탕자의 비유는 두 비유의 심장을 더 깊은 곳으로 이끕니다. 여기서 잃어버림은 단순히 길을 잃거나 손에서 미끄러진 물건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단절이자 존재의 붕괴입니다. 둘째 아들은 유산을 요구하고, 먼 나라로 가서 낭비하고, 궁핍해지고, 돼지를 치는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가 집요하게 붙드는 포인트는 "탕자의 회개는 정죄의 공포가 아니라 귀환의 가능성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있습니다. 회개는 본질적으로 '방향의 전환'이며, 신약의 회개 개념을 설명하는 메타노이아(metanoia)는 마음과 생각의 전환, 삶의 방향 수정이라는 의미로도 논의되어 왔습니다. 다시 말해 회개는 단순한 후회나 자책을 넘어, 돌아갈 아버지가 있다는 믿음 위에서 가능한 결단입니다.

비유의 가장 결정적인 문장은 "아직도 거리가 먼데"입니다. 아들은 아직 멀리 있는데 아버지는 이미 보고, 이미 측은히 여기고, 이미 달려갑니다. 이 장면이 누가복음 15장의 신학을 압축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문턱을 넘은 다음에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는 순간부터 이미 먼저 달려오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 달려옴은 인간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인간의 절망을 끝장내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고백이 문장 끝까지 도달하기 전에 이미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깁니다. 이 장면은 '용서'의 형식을 넘어 '환대'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용서가 단지 죄책의 기록을 지우는 행위라면, 환대는 관계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행위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조건을 따지는 거래가 아니라, 잃어버림을 끝내지 않으려는 결단입니다.

이 대목에서 본문과 가장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명화가 렘브런트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입니다. 이 작품은 성경 본문을 단지 삽화처럼 재현하지 않고, 사랑의 질감을 시각언어로 번역해 냅니다. 렘브런트는 누더기가 된 아들이 무릎 꿇고 아버지의 품에 파묻히는 장면을 통해 "돌아온 자의 비참함"보다 "맞아주는 자의 넉넉함"을 더 크게 보이게 합니다. 이 그림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렘브런트 말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을 오래 묵상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버지의 두 손이 주는 미묘한 감각입니다. 한 손은 힘 있게, 다른 한 손은 부드럽게 얹혀 있어, 권위와 자비가 동시에 존재하는 사랑의 양가성을 표현한다고들 해석합니다. 이런 시각적 경험은 누가복음 15장 설교의 언어가 단지 이성의 설명을 넘어, 심장에 닿는 울림이 되도록 돕습니다. 실제로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렘브런트의 이 작품을 매개로 탕자의 비유를 묵상한 영성 고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의 공식 소개 글에서도 이 그림과의 만남이 깊은 영적 여정을 촉발했다고 설명합니다. 장재형목사가 설교 중 '발'의 디테일을 언급하며 감탄했던 이유도 여기에 닿아 있습니다. 탕자의 발은 미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덜너덜하고, 상처 입고, 어딘가 비틀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틀린 발이 아버지의 품에 닿는 순간, 인간의 실패는 사랑의 자리에서 다시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돌아온 자를 꾸미지 않는 사랑, 돌아온 자를 다시 살리는 사랑, 그 사랑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비유는 '따뜻한 포옹'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맏아들의 분노로 닫힙니다. 장재형목사가 현실적으로 가장 예민하게 다루는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맏아들의 분노는 악의라기보다, 많은 종교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정당한 감정'처럼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 오래 있었고, 명을 어기지 않았고,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동생에게는 잔치가 열리고, 자신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고 느낍니다. 이때 분노는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왔는가?"라는 정체성의 질문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은 죄인의 회개만 다루는 장이 아니라, 의인의 자기의(自己義)를 다루는 장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수군거림이 맏아들의 분노로 확장되는 순간, 우리는 이 본문이 타인을 정죄하라고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내 안의 맏아들'을 드러내라고 주어진 말씀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성경의 여러 대비를 불러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창세기 4장에서 가인에게 "네가 왜 화를 내느냐"라고 물으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늦게 온 자에게 먼저 품삯을 주시는 주인의 행동. 이 모든 텍스트는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공로 감각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복음은 공로의 세계를 무시하지 않지만, 공로를 구원의 근거로 삼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로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은혜를 '불공평'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맏아들이 분노한 이유는 아버지가 불의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은혜롭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문장은 단지 맏아들을 달래는 문장이 아니라, 사랑의 경제학을 선언하는 문장입니다. 사랑은 부족함을 전제로 거래되지 않고, 풍성함을 전제로 나누어집니다. 맏아들은 '내 몫'만을 바라보는 순간, 이미 아버지 집의 풍성함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스스로 빈곤해졌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한 해를 사는 방식'으로 설교를 밀어 넣습니다. 우리가 한 해를 살아가며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라는 선언은, 단지 종교적 수사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곧 관심의 초점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내 관심이 문제없는 아흔아홉에 고정될 때, 나는 숫자로 안정을 삼고 사람을 기능으로 평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하나에게 관심이 이동할 때, 삶의 온도가 달라집니다. 손해처럼 보이던 일이 어느 순간 따뜻함이 되고, 타인의 문제로 치부하던 상처가 내 기도의 영역으로 편입됩니다. 그리고 그때 "기쁨"이 생깁니다. 장재형목사가 에베소서 1장을 언급하며 '찬송'과 '충만'을 연결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찬송은 상황이 좋아서가 아니라, 사랑이 충만해서 터져 나옵니다. 사랑받는 자의 기쁨과 사랑하는 자의 기쁨이 포개질 때, 인간은 고난 가운데서도 '찬송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는 결국 '감정의 훈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맏아들의 분노를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정당함이 사랑을 침묵시키는 순간입니다. 분노는 때로 정의감의 다른 이름이지만, 그 정의감이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만들 때, 그것은 죄가 문 앞에 엎드린 상태가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감정을 억누르라고 말하기보다, 감정을 "말씀의 지혜로 재해석하라"고 요청합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분노하게 만드는지, 그 분노 속에 내가 놓치고 있는 은혜의 풍경이 무엇인지, 내 계산이 하나님의 기쁨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 일이 필요합니다. 로마서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라고 말할 때, 그 풍성함은 신학적 정보량이 아니라 '하나님 방식으로 세상을 읽게 하는 지혜'의 풍성함입니다. 그 지혜는 원망을 감사로, 비교를 겸손으로, 정죄를 긍휼로 변환시키는 힘을 가집니다.

이렇게 보면, 장재형목사가 누가복음 15장을 '교회 리더십'과 연결해 목자들의 모임을 "Shepherd's Meeting"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더 또렷해집니다. 목자는 양이 많은지 적은지로 자신의 성취를 측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을 찾는 마음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어떤 세계를 추구하는가를 한 문장으로 묻는다면, 누가복음 15장은 이렇게 대답하게 합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자를 향해 길을 내는 공동체다." 이때 길을 내는 것은 거창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다가가 식탁을 함께 하는 용기일 수도 있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듯 집 안을 쓸어 가며 내 일상을 정돈하는 성실일 수도 있으며, 아직도 거리가 먼 사람을 향해 달려가 입맞추는 용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끝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늘의 기쁨은 먼 신비가 아니라, 사랑이 회복을 일으키는 순간 인간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현실이 됩니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누가복음 15장에서 길어 올리는 신앙의 결론은, 사랑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사랑을 '닮아' 살라는 요청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선택,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는 수고, 잃어버린 아들을 향해 달려가 목을 안는 환대, 그리고 잔치의 문턱에서 분노하는 맏아들을 향해 다시 나와 권면하는 아버지의 인내. 그 모든 장면은 "하나님 사랑은 한 번의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되는 태도"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려 하면 늘 마음속에서 반대 논리가 올라옵니다. "그 사람은 자격이 없어." "이건 손해잖아." "왜 나만?" 그러나 누가복음 15장은 그 반대 논리를 꿰뚫고, 더 깊은 논리를 들려줍니다. "잃었다가 얻었다." 이 문장 하나가 사랑의 모든 어리석음을 정당화합니다. 십자가가 세상 눈에는 어리석음이지만, 그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는 역설처럼, 사랑은 때때로 가장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가장 깊은 생명을 낳습니다.

그래서 한 해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묻는다면, 장재형목사는 '성공'이나 '성취'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일'을 놓습니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삶을 더 뜨겁고 선명하게 만드는 실천적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갈수록 우리의 시선은 잃어버린 자에게로 옮겨가고, 우리의 언어는 수군거림에서 찬송으로 바뀌며, 우리의 감정은 원망에서 감사로 정련됩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거대한 숫자가 아니라, 돌아온 한 사람의 생명이며, 그 생명이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목자로 서는 순간 우리의 삶도 함께 따뜻해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은 그렇게, 하나님 사랑을 "설명"하는 장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느끼게 하는 장"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 초대에 응답하는 방식은 결국 하나입니다. 오늘 내 곁의 잃어버린 하나를 위해, 내가 먼저 한 걸음 움직이는 것. 하늘의 기쁨은 바로 그 한 걸음에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