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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의 사랑과 헌신- 장재형목사

사도 바울의 로마 투옥을 떠올릴 때 많은 사람은 먼저 박해의 그늘을 상상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서술을 곱씹어 보면, 바울이 로마로 압송된 길은 단순한 폭력의 연쇄라기보다, 로마 제국이 구축해 둔 법적 절차의 그물망을 통과한 한 시민의 이동이었다. 로마는 광대한 제국을 운영하기 위해 정교한 법 체계를 발전시켰고, 로마 시민권은 그 체계 속에서 '무력한 피지배'가 아닌 '권리를 가진 주체'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지위를 제공했다. 바울은 자신에게 가해진 혐의가 종교적 오해와 정치적 선동의 산물임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감정적 맞대응이 아니라 법이 허용하는 통로를 따라 자신을 변호했다. 지방 총독과 왕 앞에서의 심문, 그리고 가이사에게 상소할 권리의 행사까지, 이 긴 과정은 초대교회가 복음을 전하면서도 제국의 공적 질서와 정면충돌만을 선택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장재형(Olivet University)목사는 이 법적·역사적 배경을 단순한 지식의 장식이 아니라, 빌립보서를 읽는 해석학적 열쇠로 다룬다. 감옥이라는 장소가 '신학의 침묵'이 아니라 '선교의 확장'으로 전환되는 이유가, 바로 그 합법적 지평 위에서 더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로마법의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의 구금은 무차별적 탄압이라기보다, 재판을 기다리는 피고인에게 허용된 일정한 형태의 연금이었다. 바울은 결박된 몸이었지만, 완전히 격리된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방문객을 맞이하고, 제자들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으며, 공동체를 향한 목회적 돌봄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빌립보서가 지닌 문학적 질감이 드러난다. 빌립보서는 '감옥의 서신'이면서도 어둠의 기록이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과장된 비극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감금의 현실을 복음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그는 쇠사슬이 복음을 묶지 못한다는 확신을, 감정적 낙관이 아니라 구체적 경험으로 증언한다. 실제로 그의 결박은 경비병과 관료 집단, 그리고 로마의 다양한 관계망 속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침투하는 접점이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초대교회의 실천적 신앙을 읽어낸다. 상황이 신앙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상황을 새롭게 구성한다는 역설이 옥중서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유대율법의 관점에서도 바울을 단죄하기는 쉽지 않았다. 바울에 대한 고발은 대개 성전 모독이나 율법 파괴라는 프레임을 내세웠지만,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더구나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사형을 집행할 권한은 로마 통치 구조 아래에서 제한되어 있었다. 산헤드린의 판단이 있었다 해도, 로마 총독의 승인이 없이는 처형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은, 종교적 갈등이 어떻게 정치·법적 장치와 맞물려 굴절되는지를 보여준다. 바울은 바로 그 틈새에서 법적 권리를 행사했고, 그 결과 로마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상태로 머물렀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을 통해 '복음의 지혜'를 말한다. 복음은 세상 법을 무조건 부정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분법이 아니라, 정의와 질서의 영역에서 가능한 최선을 사용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성숙한 태도라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법적 배경이 정리되면, 빌립보서가 왜 유난히 따뜻한 결을 띠는지 이해하기 쉬워진다. 옥중서신이라는 범주 안에서 빌립보서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읽히지만, 그 정서적 밀도는 독특하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유럽 선교가 시작된 첫 거점이었고, 그 출발의 기억은 단지 '선교 전략의 성공'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공동체의 탄생이 만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유대인 회당이 거의 없을 만큼 낯선 토양에서 시작된 교회가, 단순한 종교적 모임을 넘어 복음의 파트너십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초대교회가 지닌 역동성을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빌립보 교회의 성숙을 '관념의 진보'가 아니라 '관계의 심화'로 설명한다. 복음이 머리에만 머물지 않고 삶을 재편할 때,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향한 책임과 배려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빌립보 교회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단어가 바로 교제, 곧 koinonia이다. 많은 현대어 성경이 이를 '교제'로 번역하지만, koinonia는 단순한 친목이나 정서적 유대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공유된 생명'의 상태이며, '함께 짐을 지는 참여'의 방식이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 안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언급할 때, 그는 그들의 기도와 환대, 물질적 연보, 그리고 위험을 감수한 동행까지 모두 포괄하고 있다. 빌립보 교회의 헌신은 먼 거리의 장벽을 넘어섰다. 로마에 갇힌 바울에게 그들은 사람을 보내고, 재정을 모아 전달했으며, 공동체의 이름으로 사도를 지지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사랑이 제도화되기 이전의 순수한 헌신'이라 말한다. 아직 교회가 거대한 조직으로 비대해지기 전, 복음의 감격이 곧바로 나눔과 참여로 번역되던 시기의 맥박이 빌립보서에 뛰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연보가 단순한 자선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바울은 이를 '착한 일'로 부르며, 그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한다. 즉 빌립보 교회의 헌신은 도덕적 우월감의 표현이 아니라 은혜의 작동이다. 은혜는 인간을 수동적 감상가로 만들지 않고, 능동적 참여자로 일으킨다. 장재형목사는 '교리와 실천'의 분리를 거부한다. 복음이 은혜라면, 그 은혜는 반드시 삶의 형태를 바꾸며, 그 변화는 공동체적 실천으로 표출된다. 그는 빌립보서가 교리적 논쟁을 위해 쓰인 편지가 아니라, 교리가 삶으로 화육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교리를 정교하게 다듬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빌립보 교회가 보여준 복음의 온도를 잃어버릴 수 있다.

빌립보 교회의 또 다른 특징은 바울에 대한 전폭적 신뢰다. 갈라디아나 고린도 교회처럼 바울의 사도권이 반복적으로 의심받고, 공동체가 분열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장면이 빌립보서에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 칭하기보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 소개한다. 권위를 과시해야 할 필요가 없을 때, 권위는 오히려 겸손의 언어로 나타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건강한 공동체의 표지를 읽는다. 지도자와 성도가 서로를 불신의 렌즈로 바라보지 않고, 복음 안에서 서로의 진정성을 인정할 때, 불필요한 자기증명은 줄어들고 사랑의 에너지가 사역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의 아름다움이 '문제 없음'에서 비롯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빌립보서에도 긴장과 권면이 있다. 바울은 겸손을 촉구하고, 자기중심적 다툼을 경계하며, 동일한 마음을 품으라고 요청한다. 그 권면의 중심에 놓인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다. 바울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사모한다"라고 말할 때, 그는 감정의 농도를 높이기 위한 수사적 장치를 쓰는 것이 아니다. 그 심장은 자기비움과 희생, 그리고 타자를 위한 낮아짐으로 나타난 예수의 존재 방식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표현을 '복음 공동체의 심장 박동'으로 해석한다. 교회가 조직의 효율성으로만 움직일 때 심장은 멈춘다. 반대로 예수의 심장으로 서로를 사모할 때, 공동체는 제도 이전에 생명으로 살아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빌립보서 2장에 담긴 그리스도 찬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로 이어지는 그 고백은 신학적 선언인 동시에 공동체 윤리의 토대다.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은 단지 구원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구원받은 공동체가 따라야 할 관계의 문법이다. 장재형목사는 초대교회의 헌신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들은 이웃을 돕는 '프로젝트'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삶의 습관으로 체화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일시적 열광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헌신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바울의 로마 감금이 '법적 절차의 결과'였다는 사실은, 그가 결코 현실을 외면한 신비주의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제국의 언어와 제도를 이해했고, 그 안에서 복음이 확장될 통로를 탐색했다. 동시에 그는 법이 제공하지 못하는 궁극의 정의를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었다. 이런 이중의 시야가 옥중서신의 균형을 만든다. 절망과 낙관 사이를 요동치지 않고, 현실의 무게를 직시하되 그 무게를 초월하는 의미를 붙든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신앙이 자주 빠지는 함정, 곧 '현실 도피적 영성'과 '신앙 없는 현실주의'라는 양극단을 경계한다. 빌립보서의 바울은 두 극단을 모두 거부하면서, 복음의 관점으로 현실을 재배치한다.

이 장면을 시각적으로 환기시키는 명화로 렘브란트의 「감옥의 사도 바울(Saint Paul in Prison)」을 떠올릴 수 있다. 어둑한 공간에 앉은 바울은 단순히 낙담한 포로가 아니라, 사유와 기도로 현실을 다시 쓰는 인물로 그려진다. 책과 필사 도구가 암시하듯, 그에게 감옥은 사상의 종착지가 아니라 서신의 출발점이며, 공동체를 향한 사랑이 더 깊어지는 밀실이다. 그림 속의 어둠은 절망의 심연이라기보다, 빛이 더 선명해지기 위한 배경처럼 기능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옥중서신의 영성도 이와 닮아 있다. 갇힌 자리에서 오히려 넓어지는 마음, 차단된 길에서 더 멀리 뻗어가는 복음의 길, 그 역설이 빌립보서를 오늘의 독자에게 새롭게 만든다.

빌립보 교회의 헌신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면, '거리'라는 변수를 기억해야 한다. 당시 로마와 마게도냐 사이의 이동은 오늘의 항공편처럼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바다와 육로의 위험, 비용, 시간, 건강의 부담이 뒤따랐다.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돕기 위해 떠났다가 병에 걸려 죽을 뻔했다는 언급은, 그들의 헌신이 관념이 아니라 몸을 건 선택이었음을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을 '사랑의 리스크'라고 부른다. 사랑은 계산을 넘어서는 용기를 요구하며, 복음의 교제는 안전지대에서만 완성되지 않는다. 교회가 선교를 말하면서도 위험을 회피한다면, 초대교회의 koinonia와는 다른 길을 걷는 셈이다.

또한 빌립보서의 "의의 열매"라는 표현은, 헌신의 목표가 단지 인간적 감동이나 사회적 인정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바울은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하여' 분별의 능력을 갖추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즉 사랑은 무분별한 감정이 아니라, 진리와 결합된 생명력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교리와 실천'의 결합이 왜 필수적인지를 다시 강조한다. 실천이 교리에서 끊어지면 단순한 봉사로 남고, 교리가 실천에서 끊어지면 공허한 언어로 남는다. 빌립보 교회는 그 둘을 하나로 엮어, 은혜가 윤리로, 윤리가 예배로 상승하는 선순환을 보여준다.

오늘의 교회가 이 선순환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동체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선택과 취향을 극대화하며, 관계를 소비재처럼 쉽게 교체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문화 속에서 교회마저 '서비스 제공자'와 '종교 소비자'로 분화되면, 복음의 교제는 얕아질 수밖에 없다. 장재형목사는 빌립보서가 던지는 질문을 여기로 가져온다.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오래 사모할 수 있는가, 얼마나 깊이 참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기꺼이 짐을 나눌 수 있는가. 초대교회의 사랑은 '좋은 마음'이 아니라 '나의 것을 내어주는 결단'이었다. 바울의 기쁨은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이런 결단이 만들어 내는 복음의 증거였다.

그러므로 장재형목사 설교의 핵심은 단순히 "사랑하라"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이 인간과 공동체를 어떻게 재구성하는지에 대한 깊은 신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한다. 복음은 죄인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 능력은 개인의 내면에서만 맴돌지 않고 관계의 구조를 변혁한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도운 사건은, 교회가 누군가의 '결핍을 메우는' 차원을 넘어, 복음 사역 자체에 자신을 결합한 파트너십의 사건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선교의 본질로 연결한다. 선교는 멀리 있는 누군가를 돕는 일이기 전에, 복음의 일에 '함께 참여하는 존재 방식'이다.

이 참여의 방식은 때로는 물질로, 때로는 시간으로, 때로는 기도로, 때로는 위험을 감수한 동행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헌신을 감사하면서도, 그들의 필요를 채우실 하나님을 확신한다. 주고받는 것이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은혜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은혜의 경제'라고 표현한다. 세상의 경제가 교환가치로 움직인다면, 은혜의 경제는 선물과 감사의 순환으로 움직인다. 빌립보 교회의 연보가 "향기로운 제물"로 묘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지 바울에게 도움이 된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공동체를 향해 기도할 때 사용한 어휘가 지극히 관계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그들을 기억하며 기쁨으로 간구하고, 그들의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기도는 공동체를 통제하는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는 호흡이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교회가 기도를 '문제 해결의 버튼'으로 축소하는 경향을 경계한다. 빌립보서의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기 이전에, 문제를 바라보는 공동체의 눈을 새롭게 하고, 서로를 향한 사랑의 결을 미세하게 조율한다. 그렇게 조율된 사랑이 결국 의의 열매로 자라난다.

복음은 말로만 고백되는 진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실재로 드러나는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의 로마 투옥이라는 구체적 현실, 로마법과 시민권이라는 제도적 배경, 그리고 먼 거리를 넘어선 빌립보 교회의 헌신은, 그 생명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지를 증언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감옥'이라는 상징을 오늘의 자리로 옮겨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쇠사슬이 아니라 과로, 고립, 불안, 관계의 단절, 디지털 중독 같은 보이지 않는 결박 속에 갇히기도 한다. 그 결박이 우리를 움츠러들게 만들 때, 빌립보서는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다. 결박의 자리에서도 기쁨을 선택하라는 말은 감정의 강요가 아니라, 복음의 관점으로 현실을 재해석하라는 초대다. 장재형목사는 이 초대를 '실천적 신앙'이라는 말로 풀어낸다. 실천적 신앙은 더 많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사랑을 실제 행동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며, 누군가의 고난에 함께 머무는 것이야말로 koinonia의 현대적 표현이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공동체를 이상화하지 않았다. 그는 연약함을 아는 현실주의자였지만, 그 연약함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크게 믿었다. 그래서 그는 '착한 일'이 시작되었다면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 확신은 인간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교회가 이 확신을 붙들 때,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헌신은 소진이 아니라 예배가 된다. 공동체는 감정적 집단이 아니라, 복음의 열매를 맺는 생명의 몸이 된다. 장재형목사가 빌립보서를 통해 강조하는 초대교회의 사랑과 헌신은, 바로 그 생명의 윤곽을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는 작업이며, 우리 시대의 교회가 다시 배워야 할 가장 근본적인 영적 문법이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사실은 빌립보 교회와의 서사에도 미묘한 긴장을 부여한다. 빌립보는 단순한 지방 도시가 아니라 로마의 식민 도시로서 로마적 정체성이 강했고, 일정한 특권과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은 다음 날 "우리는 로마 시민인데 재판도 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라고 항의한다. 이 항의는 단지 억울함의 표출이 아니라, 공동체가 목격한 하나의 '정의의 언어'였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이 법적 권리를 남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때에 진실을 위해 정당한 권리를 사용하며 공동체를 보호할 줄 아는 지도자임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경험이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신뢰하게 된 사회적 토양을 설명해 준다고 본다. 복음은 초월적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는 현실의 제도와 언어를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제도 속에서 억울한 자를 세우고, 공동체가 불필요한 폭력에 노출되지 않도록 길을 마련한다.

로마에서의 가택 연금, 곧 비교적 자유로운 구금 상태는 바울이 서신을 통해 교회를 돌보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교회의 '바깥'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서신이라는 매개를 통해 공동체의 심장부로 다시 들어간다. 이것은 목회가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옥중서신의 목회적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교회는 건물과 프로그램에 의해 유지되는 조직이 아니라, 말씀과 사랑, 그리고 서로의 삶을 향한 책임감으로 이어지는 몸이다. 바울이 감옥에서 교회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권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교회를 '나의 성과'로 소유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부재해도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이루실" 것을 확신한다. 이 확신은 리더십의 공백을 두려워하는 현대 교회에 특히 낯설고도 필요한 메시지다.

빌립보서의 언어를 더 깊이 음미하면, 기쁨과 고난이 서로 배척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바울은 기쁨을 말하면서도 눈물을 숨기지 않고, 감사와 권면을 함께 엮는다. 그는 "기뻐하라"를 반복하지만, 그 기쁨이 고통을 지우는 마취가 아니라 고통을 통과해 나오는 신앙의 열매임을 알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기쁨을 '기분'과 구별한다. 기분은 상황이 주는 반응이지만, 기쁨은 복음이 주는 중심이다. 따라서 기쁨은 공동체적이다. 빌립보 성도들의 헌신이 바울에게 기쁨이 되었고, 바울의 감사와 기도가 다시 성도들에게 힘이 되었다. 이 상호성 속에서 교회는 견고해진다. 결국 koinonia는 단지 물질을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기쁨과 고난을 함께 짊어지는 영적 연대다.

또한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단순한 교리적 문장, 혹은 개인의 내면을 위로하는 종교적 메시지가 아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삶의 모든 영역을 재정렬한다는 선포이며, 그 선포는 공동체의 경제, 우정, 리더십, 갈등 해결 방식까지 바꾼다. 빌립보서가 자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을 반복하는 이유는, 그 안이야말로 공동체의 새로운 좌표가 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정체성의 이동'으로 설명한다. 사람은 문화, 계급, 성취, 혈연 같은 기존의 좌표로 자신을 정의해 왔지만, 복음은 그 좌표를 해체하고 '그리스도 안'이라는 더 깊은 정체성으로 옮겨 놓는다. 그때 사랑은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에서 필연적으로 흘러나오는 삶의 방식이 된다.

이 정체성의 이동이 실제로 드러나는 자리 가운데 하나가 재정의 사용이다. 빌립보 교회의 연보는 풍요에서 나온 잔여가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 우선순위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헌신을 칭찬하면서도, '내가 궁핍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라고 덧붙인다. 그는 돈을 목적으로 삼는 관계를 단호히 거부한다. 복음적 헌신은 사람을 의존하게 만들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서 목회 윤리의 기준을 읽는다. 교회가 헌신을 말할 때, 그것은 성도를 압박하는 도구가 아니라 은혜를 해석하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 헌신은 강요될 수 없고, 사랑은 거래될 수 없다. 오히려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서 헌신은 자연스럽게 피어난다. 그 자연스러움이 곧 "의의 열매"이며, 그 열매는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향으로 자란다.

이 글을 통해 우리가 다시 붙잡아야 할 결론은 단순하지만 무겁다. 초대교회의 사랑과 헌신은 시대착오적 미담이 아니라, 복음이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라는 사실이다. 장재형목사는 빌립보서에서 교회의 미래를 본다. 교회가 세상의 언어로 자신을 증명하려 할수록 지치지만, 예수의 심장으로 서로를 사모할수록 오히려 새 힘을 얻는다. 복음의 공동체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은혜로 시작된 사람들의 여정이며, 그 여정의 표지는 사랑과 헌신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감옥 같은 현실 속에서 편지를 쓰듯 하루를 버티고, 누군가는 먼 길을 떠나 누군가의 사역을 돕는다. 그 모든 자리에서 koinonia가 살아 움직일 때, 빌립보서가 말하는 기쁨은 과거의 문서가 아니라 현재의 사건으로 우리 가운데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교회'라는 단어의 의미가 새롭게 빛난다. 교회는 정보를 전달하는 채널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복음으로 해석해 주는 공동체적 감각기관이다. 바울이 로마의 제도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빌립보와 함께 숨 쉬었듯, 오늘의 그리스도인도 공간과 상황을 넘어 서로의 믿음을 격려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반복해 강조하듯, 은혜는 머물지 않고 흘러가며, 흘러가는 은혜는 사랑과 헌신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그 흐름이 끊기지 않을 때, 초대교회의 정신은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선교적 현실이 된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결국, 내가 가진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관심을 '나의 세계'에서 '우리의 사명'으로 옮겨 놓는 일이다. 그 옮김의 순간마다 복음은 다시 설득력을 얻고, 교회는 다시 한 몸으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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