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은 단지 초대교회의 연대기를 나열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사건이 되고 공동체가 되는지를 증언하는 서사다.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한 사람 예수의 생애에서 멈추지 않고, 그 생애가 성령 안에서 교회로 번역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기록을 훑는 행위가 아니라, 오늘의 신앙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다시 들여다보는 작업이며, 또한 오늘의 교회가 어떤 호흡으로 살아야 하는지 묻는 과정이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에게서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강조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복음은 관념이 아니라 길이며, 성령의 인도는 장식이 아니라 결정이며, 선교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이라는 고백이다.
사도행전의 흐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땅끝으로"라는 거대한 궤도를 따라 전개된다. 예수의 승천 이후, 약속된 성령이 임하자 두려움에 갇혀 있던 제자들은 거리로 나가 증언하기 시작한다. 언어가 갈라지고 사람들이 모이며, 새로운 공동체가 태어난다. 그 공동체는 곧 박해를 만나 흩어지지만, 흩어짐은 소멸이 아니라 확장이 된다. 이 역설이 사도행전의 심장부를 이룬다. 우리는 흔히 문이 닫히면 실패라고 규정하지만, 사도행전의 하나님은 닫힌 문을 통해 더 큰 지도를 펼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사도행전 16장을 붙드는 이유도 여기 있다. 선교의 지형이 인간의 열심으로만 재단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타이밍 속에서 재배치된다는 사실이, 그 장면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은 계획과 좌절, 그리고 새로운 부르심의 연속이다. 그는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 했으나 성령이 막으셨고,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 표현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다. 성령은 때로 문을 열어주는 "허락"으로, 때로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금지"로 일하신다. 신앙은 종종 열린 길을 추적하는 능력으로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막힌 길을 받아들이는 겸손이 더 깊은 순종을 낳는다. 드로아에 이르러 더 이상 동쪽으로도 북쪽으로도 나아갈 수 없던 순간, 바울은 밤에 환상을 본다. 한 마게도냐 사람이 서서 간절히 청한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그 외침은 지리적 이동을 촉구하는 문장인 동시에, 복음의 방향을 새롭게 규정하는 신학적 명령이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요청이 결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바울의 성공 욕망을 부추기는 구호가 아니라 타자의 절박함을 들려주는 음성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전략을 증명하려 건너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려주신 한 지역의 탄식에 응답하기 위해 건너갔다. 그리고 그 건넘은 유럽으로의 첫 발걸음이 되었다. 드로아에서 바다를 건너 네압볼리에 이르고, 빌립보에 도착한다. 빌립보는 로마 식민도시로서 법과 권력이 뿌리내린 공간이었고, 복음이 들어가기에는 낯설고 단단한 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한 여인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셨고, 작은 강가의 기도 모임을 교회의 씨앗으로 삼으셨다. 감옥과 매질, 오해와 혼란 가운데서도 찬송이 울려 퍼지고, 간수의 집이 예배의 자리가 되는 이야기는, 선교가 먼저 제도나 규모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과 한 가정의 문턱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통해 "작게 시작한 순종이 역사의 문법을 바꾼다"는 원리를 되새기게 한다.
빌립보에서 시작된 작은 공동체가 훗날 바울의 편지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도 주목할 만하다. 빌립보서는 옥중에서 쓰인 편지로 전해지며,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노래하는 신앙의 문법을 담고 있다. 이는 선교가 '형통한 서사'로만 기록되지 않는다는 증거다. 사도행전이 반복해서 보여주듯, 복음은 불편함과 충돌을 피하지 않는다. 시장의 이해관계가 흔들리면 고소가 뒤따르고, 권력이 불편해하면 감옥이 열리며, 종교적 자존심이 상하면 돌이 날아온다. 그런데도 복음이 앞으로 나아가는 까닭은, 그 길을 여는 주체가 인간의 추진력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이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약속은, 선교의 에너지원이 교회의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선언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점에서, 선교를 '열심의 경쟁'으로 오해하지 말고 '은혜의 참여'로 이해하자고 촉구한다.
오늘의 교회가 마주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은, 단순히 진리의 상대화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유동화한다는 데 있다. 무엇이든 해체할 수 있다는 확신은 한편으로는 억압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의 토대를 공허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선택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동시에 방향 상실을 경험한다. 이런 시대에 "길"이라는 성경의 어휘는 특별히 선명해진다. 길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걷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현실이며, 동행이 없으면 쉽게 지치는 여정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지식의 소비자가 아니라 길 위의 제자로 부르셨고, 사도행전에서 그 길은 실제로 '사람들이 그 도를 이단이라' 부를 만큼 독특한 삶의 형태로 나타난다. 장재형목사가 "오직 예수"를 반복하는 것은, 신앙을 수많은 옵션 중 하나로 전락시키려는 시대정신에 맞서, 교회가 다시 제자도의 실재를 회복하자는 요청으로 읽을 수 있다.
그 회복은 교리의 엄격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리는 생명의 뼈대이지만, 생명의 온기는 사랑에서 나온다. 예수가 예언한 마지막 때의 '사랑의 식음'은 단지 윤리적 타락만이 아니라, 공동체가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영적 마비를 포함한다. 그래서 선교는 교회의 도덕적 과제가 아니라 영적 감각을 회복하는 훈련이 된다. 실제로 교회가 낯선 이웃을 섬기기 시작하면, 성경의 문장들이 다시 피부에 닿고, 기도가 다시 절박해지며, 예배가 다시 현실과 연결된다. 장재형목사가 이민자 공동체, 다민족 사역, 대학 사역, 온라인 사역 같은 다양한 선교적 통로를 언급하는 것도, 복음이 특정 문화의 언어에 갇히지 않도록 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복음은 언제나 번역되어야 하지만, 번역 과정에서 본질이 훼손되지 않도록 성령의 지혜가 필요하다.
또 하나 보완해 볼 지점은 '막히는 경험'의 신학이다. 많은 성도들이 막힘을 만나면 자신을 탓하거나, 반대로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16장은 막힘이 곧 버려짐이 아니라, 더 큰 사명의 전조일 수 있음을 가르친다. 성령이 막으신 것은 바울의 열정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더 넓은 지도를 위해서였다. 이것은 현대의 진로와 사역 분별에도 중요한 통찰을 준다. 취업의 문이 닫히거나, 사역의 계획이 엎어지거나, 관계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갈 때, 우리는 단순히 실패의 언어로만 해석하기 쉽다. 그러나 성령은 때로 우리의 속도를 늦추어 더 깊은 성찰과 더 정확한 파송을 준비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순간에 "멈춤의 은혜"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멈춤이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길이 다시 열릴 때 더 바른 방향으로 걷기 위한 호흡이라는 뜻이다.
이 맥락에서 이사야가 말한 '그루터기'의 이미지도 의미심장하다. 겉보기에는 황폐해 보이고, 많은 것이 베임을 당한 것처럼 보여도, 남아 있는 거룩한 씨가 있다. 역사 속 교회는 늘 그루터기에서 다시 시작했다. 제도와 문화가 쇠퇴할 때,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 새 불을 일으키셨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회복의 선교"가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성경적 패턴에 근거한 소망임을 뒷받침한다. 중심이었던 곳이 식어갈 때, 주변부였던 곳이 뜨거워지고, 다시 그 불씨가 중심으로 옮겨진다. 선교는 이 불씨의 이동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그리고 이 확장은 어느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정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사도행전의 선교는 번역과 상호성, 그리고 때로는 문화적 자기비움을 동반한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는 진리를 양보했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가 더 잘 들리도록 자신의 방식과 권리를 내려놓았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가 미국이나 세계 선교를 논할 때, 교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윤리도 여기서 나온다. 도움을 주러 간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쉽게 '구원자 콤플렉스'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의 선교사는 늘 함께 배우는 사람이며, 섬김 속에서 자신도 변화되는 순례자다. 마게도냐로 건너간 바울이 빌립보에서 만난 것은 '필요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믿음의 동역자들이었다. 선교는 일방향이 아니라 상호성의 은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디로 건너가야 하는가. 장재형목사가 자주 던지는 질문은 지리적 장소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문화의 강을 건너는 일이며, 세대의 간극을 가로지르는 일이며, 교회의 관성이라는 강물을 건너는 일이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기가 짙어질수록, 사람들은 절대 진리를 의심하고, 모든 길을 동등하게 놓으려 한다.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며, 선택은 취향이다"라는 사고가 일상이 되면, 복음은 공공의 언어에서 사라지고 개인의 취미로 축소된다. 이때 교회는 공격적으로 싸우기보다, 더 깊은 언어로 증언해야 한다. 다원주의를 향한 기독교의 대답은 타자를 억압하려는 폭력이 아니라, 구원이 한 분에게서 온다는 단순하고도 엄정한 고백이다. 사도행전 4장 12절이 선포하듯,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은 없다. 장재형목사가 "Only Jesus"를 강조하는 것은 현대 문화에 대한 반동적 태도를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혼란의 시대에 길을 잃지 않기 위한 좌표를 세우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좌표는 예수의 종말론적 가르침, 곧 올리벳담화와도 맞닿아 있다. 예수는 마지막 때에 많은 미혹이 있을 것이라 경고하셨다. 거짓 그리스도들이 나타나고, 사랑이 식고, 소문과 전쟁과 불안이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 것이다. 그러나 그 혼란 속에서도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약속이 놓여 있다. 이 문장은 공포를 조장하는 예언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을 종말론적 시계와 연결하는 선언이다. 복음 전파는 단지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역사의 종착역을 향해 움직이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결정적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종말을 논쟁의 장으로 만들기보다, 종말이 요구하는 신실함으로 우리를 부른다. 전천년이냐 후천년이냐의 견해 차이를 정죄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식지 않게 하며,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는 것이 더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성령의 인도는 신비주의적 감정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적 분별을 통해 구체화된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의 문제를 다룰 때, 사도들과 장로들은 격렬한 논쟁 끝에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표현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 문장은 참으로 담대하다. 인간의 의견이 성령의 권위를 참칭하는 순간이 아니라, 공동체가 말씀과 경험, 증언과 열매를 종합해 성령의 뜻을 식별하려 애쓴 흔적이다. 오늘의 교회가 다원주의에 노출될수록, 개인의 직감만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방식은 오히려 취약해진다. 장재형목사는 그래서 더 철저한 성경 읽기, 더 치열한 기도, 더 투명한 공동체적 점검을 요청한다. 종교개혁의 정신인 Sola Scriptura, 곧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이 이 시대에도 유효한 이유가 여기 있다. 성경은 다원주의를 억누르는 곤봉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등불이며, 인간의 욕망을 비추어 회개로 이끄는 거울이다.
장재형목사가 사도행전 16장을 오늘의 선교 지형과 연결하는 방식에는, 하나의 도발적 전환이 있다. 과거에 선교사를 대규모로 파송하던 나라들이 세속화와 자유주의 신학, 문화적 상대주의로 인해 복음의 열기를 잃어가는 현상은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교회의 과제로 나타난다. 특히 미국 교회의 변화를 바라보며, 그는 "보내는 교회"에서 "도움이 필요한 교회"로의 전환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월감의 역전이 아니다. "우리가 더 낫다"라는 사고는 선교의 독을 품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한쪽이 식으면 다른 쪽에서 불씨를 옮기신다"는 섭리의 관찰이 핵심이다. 초대교회에서도 예루살렘이 흔들릴 때 안디옥이 일어섰고, 바울의 선교가 지중해 세계로 확산될 때 로마 제국의 변방들이 복음의 거점이 되었다. 역사에서 중심은 고정되지 않는다. 중심은 언제나 성령의 불이 타오르는 곳으로 이동한다.
이런 관점에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말은, 단지 마게도냐의 특정 도시가 아니라, 복음이 희미해진 모든 지역에서 울리는 영적 신호로 읽힌다. 누군가는 물리적으로 국경을 건너야 하고, 누군가는 직업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며, 누군가는 대학 캠퍼스와 온라인 공간이라는 새로운 대륙으로 항해해야 한다. 또한 누군가는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굳어진 언어를 깨뜨려야 한다. 복음이 낡은 구호로 들리지 않도록,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더 섬세하고 더 정직한 어휘를 선택해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빠른 순종"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선교적 전환이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기회는 완벽한 조건 속에서 오지 않는다. 드로아의 바울에게도 상황은 애매했고, 길은 막혀 있었으며, 확신은 환상이라는 형태로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고, 그 움직임이 유럽 복음화의 문을 열었다.
이 대목에서 하나의 명화를 떠올릴 수 있다. 카라바조가 그린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의 성 바울의 회심'은, 말에서 떨어진 사울이 눈을 감은 채 땅에 누워 있고, 위로부터 쏟아지는 빛을 온몸으로 맞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 그림에서 사울은 주도권을 잃었다. 눈을 뜨고 방향을 잡는 이가 아니라, 빛 앞에서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존재로 그려진다. 말과 마부의 발굽, 그리고 무릎을 굽힌 노인의 조용한 태도는, 위대한 전환이 소란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이 경험한 막힘과 환상도 이와 닮았다. 인간의 계획이 교정되고, 하나님의 빛이 새로운 지도 위에 선을 긋는 순간이다. 장재형목사가 설교에서 반복해 상기시키는 것도, 선교의 출발점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직 예수"를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종종 배타성과 폭력을 연상한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진리의 단일성을 지키되, 태도에서는 온유함과 겸손을 잃지 않아야 한다. 예수는 길이 하나라고 말씀하시면서도, 그 길을 십자가로 열어젖히셨다. 길의 단일성은 타자를 밀어내는 권력의 언어가 아니라, 스스로를 내어주는 사랑의 언어로 나타난다. 장재형목사가 선교와 교회 개척을 말할 때, 그것이 숫자와 성과의 과잉으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선교는 제국적 확장이 아니라, 상처 입은 세계에 대한 섬김이며, 하나님 없는 길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돌아갈 집이 있다"고 알려주는 환대다. 로마서 8장이 말하는 것처럼, 피조물은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 그 탄식은 이념의 논쟁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흘러나오는 절규다. 무너진 관계, 깨어진 가정, 고립된 청년, 의미를 잃은 노동, 소외된 이민자 공동체, 그리고 종교적 언어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시민들 사이에서 "도우라"는 목소리는 계속된다. 지금도 이 부르심은 계속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탄식을 듣는 훈련을 교회에 요청한다. 교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높이기 시작하면, 바울이 들은 마게도냐인의 음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는 더 자주 길 위에 서야 한다. 때로는 성령이 막으시는 자리에서 멈추어야 하고, 때로는 성령이 여시는 문 앞에서 즉시 움직여야 한다. 이 리듬이 사도행전적 리듬이다. 기도와 분별, 멈춤과 전진, 눈물과 용기, 공동체와 파송이 서로 교차하며, 교회는 살아 있는 몸으로 역사를 통과한다. 장재형목사 설교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역동성이다. 성령은 교회를 박제된 제도로 남겨두지 않고, 길 위의 증인으로 세우신다.
선교의 지평을 넓히는 일은 동시에 교회의 내부 온도를 지키는 일과 직결된다. 예수는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셨다. 사랑이 식는다는 것은 단지 감정이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중심이 하나님에서 자기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교회가 선교적 삶을 잃을 때, 신앙은 유지되더라도 방향을 잃는다. 외부로 흘러가야 할 생명이 내부의 논쟁과 취향의 소비로 갇히면, 공동체는 결국 피로해진다. 반대로, 교회가 복음의 전진을 향해 마음을 열면, 새로운 사람을 환대해야 하고, 낯선 문화와 마주해야 하며, 기도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성령의 도움을 구하게 된다. 이 과정 자체가 교회를 새롭게 만든다. 장재형목사가 "선교에 참여하지 않는 교회는 식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는 이유는, 선교가 교회를 살리는 산소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6장의 이야기는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언제나 "사람"의 얼굴로 찾아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바울이 본 환상 속 마게도냐인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한 인물로 서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수많은 실제 사람들이 존재한다. 루디아,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감옥의 간수, 그들의 가족, 그리고 빌립보 교회를 이루는 무명의 성도들. 선교는 제도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얼굴과 이름을 가진 존재들을 향한 사랑의 이동이다. 오늘 우리가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말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어떤 통계나 시장 분석보다 먼저, 한 사람의 삶에서 시작된다. 교회가 도시의 가난한 이웃을 기억할 때, 또는 언어가 다른 이민자 가정의 식탁에 앉을 때, 또는 온라인 공간에서 절망을 토로하는 청년의 메시지에 답할 때, 우리는 이미 건너가고 있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이야기하는 미국 교회에 대한 부담도, 결국은 한 나라를 평가하려는 담론이 아니라, 그 땅에서 울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자는 요청으로 읽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대각성운동이 일어난 시기에도, 부흥은 단지 집회장의 열기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말씀에 대한 갈망, 회개, 사회적 책임, 선교적 파송이 함께 움직일 때 부흥은 생태계를 이룬다. 오늘의 부흥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진리를 선명히 하되 사랑을 잃지 않고, 경계를 세우되 담을 쌓지 않으며, 자신을 지키되 세상을 외면하지 않는 균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균형은 "성령의 인도"라는 단어로만 유지되지 않는다. 실제로는 시간과 재정, 인력과 감정,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구체적 결단으로 드러난다. 장재형목사가 교회 개척과 선교 프로젝트를 언급할 때, 그는 바로 이런 구체성을 강조한다. 성령은 추상적 영감으로만 머물지 않고, 사람을 보내고, 관계를 맺게 하며, 한 지역의 예배를 세우는 현실적 동력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예수가 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하지만, 더 깊이 보면 "예수의 계속되는 사역"을 증언한다. 예수는 승천하셨으나, 성령을 통해 교회 가운데서 계속 일하신다. 그래서 선교는 예수의 부재를 채우는 인간의 노력이라기보다, 예수의 현존에 참여하는 기쁨이다. 올리벳담화가 경고하는 마지막 때의 미혹도, 결국은 예수의 이름을 빌려 다른 길을 만들려는 시도다. 교회가 그 미혹을 이기는 방법은 권력의 대결이 아니라, 예수를 더 깊이 아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가 자신을 길이라고 선포하실 때, 그것은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건네는 위로였다. "너희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주어진 길의 약속이다. 장재형목사가 "오직 예수"를 설교할 때도, 그것은 공포를 조성하는 슬로건이 아니라, 길을 잃은 시대에 건네는 위로와 초대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부르심은 오늘 우리에게 성숙한 신뢰와 지체 없는 용기를 함께 요구한다. 계획이 무너질 때 자신을 정죄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성령의 막으심 속에 숨은 더 넓은 지도를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동시에 성령이 여시는 문 앞에서 조건을 계산하느라 머뭇거리지 않고, 바울처럼 즉시 돛을 올리는 담대함도 요구된다. 이런 신뢰와 담대함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말씀에 뿌리내린 기도와 공동체적 분별 속에서 천천히 빚어진다. 그리고 끝내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사랑으로 드러난다. 그 실행은 거창한 성공담이 아니라 작은 순종의 연속이며, 한 사람의 기도와 한 교회의 파송이 모여 복음의 길은 땅끝으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는 이 길을 교회의 생명으로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바울은 로마에 이르러 갇힌 몸으로도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 길이 막힌 듯 보이는 자리에서도 복음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사도행전이 독자에게 남기는 열린 결말이다. 오늘의 교회도 동일한 열린 결말 속에 서 있다. 문화의 바람이 거세고, 진리가 조롱받으며, 사랑이 식어가는 시대라 할지라도, 성령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여시고, 교회를 움직이시며, 새로운 마게도냐의 외침을 들려주신다. 장재형목사라는 키워드가 가리키는 설교의 중심도 결국 여기로 모인다. 성령이 이끄시는 복음 전파, 오직 예수로의 귀환, 그리고 건너가야 할 자리에서 지체하지 않는 순종.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엮일 때, 교회는 다시 길이 되고, 세상은 다시 도움을 얻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