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션

디도서 1장 5–16절 — 장로를 세우는 복음의 질서 | 장재형 목사 강해

장재형목사는 디도서 1장 5-16절을, 교회를 세우는 일의 핵심과 사도의 남겨 둔 사명을 이어받는 목회의 실체를 보여 주는 본문으로 읽는다. 바울이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이라고 말할 때 이는 단순한 인사 이동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시작하신 일을 다음 세대 제자들이 계속 잇게 하려는 하나님의 경륜이 담겨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집이며, 목회란 그 남은 일을 충성되게 정리하고 완성해 가는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에게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라"고 위임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따라, 복음을 지키는 교리의 사수와 교회를 '빌드업'하는 직제의 수립이 목회의 두 기둥임을 분명히 한다. 신앙(Faith)은 진리와 교리의 문제이고, 직제(Order)는 구조와 질서의 문제다. 교리는 토대이고, 직제는 그 위에 올라서는 지붕과 벽, 창과 같다. 복음을 지키지 못한 조직은 껍데기이고, 질서를 세우지 못한 교리는 공중에 떠 있는 이론일 뿐이다. 디도서 1장은 이 둘을 동시에 요청한다.

그레데는 큰 섬이었고 도시가 여럿이었다. 바울의 선교에는 일관된 철학이 있었다. 도시 중심 선교, 유대인 우선 선교, 자비량 선교, 그리고 남의 터 위에 집을 짓지 않는 전방 개척 선교. 이 전략을 따라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졌고, 이제는 장로를 세워 질서를 갖출 차례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위대한 복음 해석자이자 동시에 탁월한 교회 행정가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디도서에 기록된 장로·감독의 기준은 그가 교회를 '집'으로 일으켜 세웠는지를 보여 주는 설계도다. 개척자는 혼자 오래 끌고 가려 해서는 안 된다. 하루라도 빨리 장로들을 세우면 교회에 기둥이 서고 지붕이 덮이며, 벽과 창이 갖추어진다.

바울은 먼저 장로의 자격을 가정에서 확인한다.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거나 불순종하다는 비난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 교회 리더십은 가장 가까운 공동체인 가정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가정을 다스리지 못한 채 교회를 맡는 것은 토대 없는 건축과 같다. 여기서 '방탕'으로 번역된 ἀσωτία는 절제와 검약을 잃은 무절제·사치·과시의 삶을 뜻한다. 장재형목사는 목자는 검약과 절제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보여 주기식 소비와 흥청망청의 생활, 허영으로 포장된 '성공'은 장로직과 양립할 수 없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이므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청지기는 '내 것'의 논리가 아니라 '주의 것'의 논리로 살림을 관리한다. 그래서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고, 급히 분을 내지 않고, 술과 폭력에 지배되지 않으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않는다. 이 네 항목은 모두 혈기와 탐욕이라는 한 뿌리에서 올라오는 가지들이다. 장재형목사는 모세의 생애를 "혈기 빼기"의 역사로 읽는다. 광야의 시간은 다혈질과 조급함을 벗겨 내고 온유와 유순함을 입히는 하나님의 신학교다. '구타하지 않음'이 자격 요건에 포함된 것을 보면, 초대 교회의 현실이 얼마나 날것의 인간성을 안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의 집을 세우는 감독은 맞을지언정 때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부정 항목만이 아니다. 바울은 긍정적 덕목을 덧붙인다. 나그네 대접, 선행을 사랑함, 신중·의로움·거룩·절제. 나그네 대접은 넘침의 덕이다. 창세기 24장에서 리브가는 낯선 이에게만이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마시게 했다. 피곤한 타자에게 흘려 보낼 여유, 그것이 장로의 집에 있어야 한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선을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의 설계도에 새겨진 창조적 본성이다. 선을 행하면 기쁨이 따른다. 십대 청소년에게도 이 명제를 새겨야 한다. 행복은 사랑하고 선을 행할 때 따라오는 결과다. 신중함은 사건의 표피를 벗기고 맥락을 헤아리는 능력이다. 무례한 폭로와 즉각적 선동보다, 덮어야 할 것을 덮고 세워야 할 것을 세우는 의로움이 교회를 지킨다. 거룩은 하나님께 속함이고, 절제는 그 속함을 일상에서 유지하는 실천이다.

이 모든 덕목의 중심에는 말씀에 대한 태도가 있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라.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라." 감독은 '권면'과 '책망'이라는 두 날의 칼을 함께 들어야 한다. 권면 없는 책망은 냉혹해지고, 책망 없는 권면은 흐물흐물해진다. 장재형목사는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가 한목소리로 요청하는 "진리 사수"를 오늘 목회 현장의 첫 번째 의무로 세운다. 신조와 교리, 곧 복음의 핵심을 밤낮으로 공부하고 지키는 것, 이것이 첫째다. 그리고 둘째가 직제의 수립, 곧 장로와 감독을 세우는 조직화다. 실제로 많은 교회 혼란의 표면에는 가짜 교훈이 있고, 그 배후에는 '이득'이 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우리가 동일한 성령, 동일한 보조로 행했지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고 밝힌 대목은, 영의 사람은 돈의 궤계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더러운 이득"을 탐하는 자는 감독으로 부적격하다. 교회를 분탕질하는 자들의 본질은 거짓말과 이익 추구다.

디도서 1장 10절 이하에서 바울은 현실의 적을 명징하게 지적한다.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데, 특히 할례파 가운데 그러하다." 그들은 은혜의 복음으로 자유 얻은 영혼에게 다시 무거운 종교의 멍에를 씌운다. 갈라디아서의 논쟁-믿음이냐 행위냐-가 그레데에서도 반복된다. 복음은 율법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그 완성을 통해 죄와 정죄, 종교적 강박에서 자유를 선포한다. 그런데 속이는 자들은 신앙을 혈통과 의식의 표지로 환원하고, 은혜를 성취해야 할 '과제'로 바꿔 놓는다. 바울은 이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공개적이고 정정당당한 진리의 논증으로 견고한 진을 무너뜨렸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오늘 교회에도 그대로 대입한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비난자들은 공개 토론을 회피하고 뒷골목에서 양을 찌른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의 침묵을 대신해 소리를 내야 한다. "그들의 입을 막아라." 그러나 방식은 폭력과 혈기가 아니라, 바른 교훈과 단호한 치리다. 요한계시록 11장은 바깥 마당보다 성전 안을 척량하라고 한다. 외부의 공격 못지않게 내부의 왜곡을 바로잡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에베소서 6장은 전신 갑주를 요청한다. 검은 말씀이고, 흉배는 의이고, 투구는 소망이며, 믿음은 방패다. 교회가 이 장비를 벗으면 소문과 음해, 사적인 영향력 싸움 앞에 무방비가 된다.

그레데의 문화적 진단처럼 보이는 바울의 날 선 인용-"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은 무차별 일반화가 아니라 거짓 교사들의 자화상을 비튼 말이다. 바울은 "이 증언이 참되다"고 응수하며 그들을 엄히 꾸짖어 믿음을 온전케 하라고 한다. 꾸짖음은 파괴가 아니라 치료다.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는 길이다. 결론부의 선언은 오늘 우리에게도 날카롭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하지 않다.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럽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한다." 말과 삶의 괴리가 깊어질수록, 아무리 거룩한 의식도 마음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 반대로 마음이 은혜로 씻긴 자는 일상의 소소한 일까지 거룩의 향기로 물든다. 그래서 장로의 자격 목록은 결국 '존재'의 문제, 은혜로 빚어진 성품의 문제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오늘의 예배와 공동체 생활에도 곧바로 연결한다. 교회는 '총회'(assembly)다. 히브리서 12장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를 말한다. 흩어진 성도들이 주의 전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전통이 교회를 교회되게 한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편의와 매체가 신앙을 대신할 수 없다. 가능한 한 성도는 주의 전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아이가 어려도 부모의 손을 잡고 교회로 가야 한다. 주일성수를 위해 싸워 온 신앙 선배들의 발자취가 오늘 우리에게도 표준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예배의 중심을 회복하라는 권면이다. 예배의 자리에서 말씀과 성례, 교제와 치리가 일어나고, 그 한가운데에서 장로들이 세워진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 교리는 매일의 과목이다. 장로 후보자와 감독은 신조와 요체, 복음 교리의 뼈대를 몸에 새겨야 한다. 변하는 담론의 파도에 떠밀리지 않으려면, 변치 않는 복음의 언어를 암기하고 묵상하고 가르쳐야 한다. 둘째, 질서를 세워라. 리더를 세우고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하며, 재정은 투명하게, 치리는 공정하게, 회의는 공개적으로. 교리와 질서가 함께 갈 때 교회는 '집'이 된다. 셋째, 가정에서 시작하라. 믿는 자녀를 양육하고 부부의 신의를 지키며, 절제와 검약을 일상의 미학으로 삼으라. 넷째, 혈기를 빼라. 분노를 늦추고 경청을 훈련하며, 폭력적 언어와 행동을 단호히 끊으라. 다섯째, 나그네를 대접하라. 낯선 이에게도 자리를 내어 주는 환대는 공동체를 넓히는 보이지 않는 사도직이다. 여섯째, 거짓을 꾸짖어라. 익명과 소문, 왜곡으로 양 떼를 흔드는 자들이 있거든 공개성과 진리로 맞서 그들의 입을 막아라. 다만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이어야 한다.

이 모든 가르침의 표본으로 바울은 디도를 세운다. 디도는 바울의 "참 아들"이었고, 시간이 흘러 "동역자"가 되었다. 고린도의 폭풍 속에 들어가 눈물의 편지를 전달하고 교회를 바로 세운 사람, 가장 어려운 도시와 혼란의 현장에 파송될 수 있는 사람,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않고 동일한 성령과 동일한 보조로 행한 사람. 바울은 그에게 "남은 일을 정리하라"고 맡긴다. 오늘 교회도 마찬가지다. 사도의 남은 일을 이어받을 디도들이 필요하다. 장재형목사는 그 디도를 세우는 길을, 디도서 1장의 교훈으로 구체화한다. 복음을 진리로 붙들고, 성품을 은혜로 단련하고, 질서를 지혜로 세우는 리더. 그 리더들이 세워질 때, 교회는 거짓의 공세를 이기고 선한 일에 헌신하는 하나님의 집으로 우뚝 선다.

마지막으로, 이 본문은 우리 각자에게도 거울이 된다. 나는 청지기인가, 주인인가. 나는 권면과 책망을 함께 사용할 줄 아는가. 나는 나그네를 대접하는가. 나는 선을 사랑하는가. 나는 진리로 싸우되 혈기로 싸우지 않는가. 나는 입으로 시인하는 하나님을 삶으로도 시인하는가. 디도서 1장 5-16절은 장로 후보자의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복음이 빚는 인간의 초상이다. 장재형목사의 강해는 그 초상을 우리 시대의 언어로 또렷하게 드러낸다. 교리로 토대를 두껍게 하고, 질서로 집을 단단히 세우며, 사랑과 선행으로 창을 열어 바람과 빛이 드나들게 하라. 그렇게 사도의 남겨 둔 일을 오늘 여기서 충성되게 이어가라. 그것이 교회를 교회답게, 성도를 성도답게 만드는 길이다.

davidja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