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모데전서 2장은 오늘까지도 교회 안팎에서 첨예한 논쟁을 불러오는 본문이지만, 본문이 놓인 시대와 상황, 그리고 성경 전체의 흐름을 함께 읽어 내면 초점은 '차별'이 아니라 '예배의 질서와 화평'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논의를 시작해 2장 8-15절을 억압의 명령으로 좁히지 않고, 혼란스러워진 예배를 바로 세우려는 목회적 처방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바울이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다른 권면을 준 이유는 우열을 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거룩을 회복하게 하려는 배려다. 남성에게 "분노와 다툼 없이 거룩한 손을 들라"는 말은 손을 드는 모양새가 아니라 화해와 정결이라는 내면의 상태를 가리키며, 여성에게 외적 꾸밈보다 선행과 정절을 강조한 이유도 금욕주의 때문이 아니라 예배의 본질을 흐리던 과시 문화를 멈추게 하려는 마음에서 나왔다. 장재형목사는 예수께서 제물보다 먼저 화목을 명하신 말씀을 함께 비추며, 예배는 관계의 회개와 화해를 통해 얻는 거룩, 세속적 가치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결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향기가 된다고 설명한다.
이 관점은 곧바로 가장 논쟁적인 표현, 곧 "여자는 잠잠하라"는 구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을 문자적으로 일반화해 여성의 입을 막는 근거로 쓰는 태도가야말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칙을 놓친 것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당시 에베소는 로마 제국의 사치와 신비주의가 뒤섞인 도시였고, 교회 안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가르침과 열광이 예배의 질서를 흔들 위험이 있었다. 고린도교회처럼 예배 중 방언과 예언이 뒤엉켜 회중을 덮어버리는 일이 일어나자, 바울은 질서를 회복시키는 구체적 지침을 디모데에게 보냈다. 여기서 초점은 '여성'이라는 성별이 아니라 '무질서' 자체다. 장재형목사는 고린도전서 14장-"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의 하나님"이며 "모든 것을 품위 있게, 질서 있게 하라"-의 결론이 디모데전서 2장을 비추는 해석의 거울이라고 짚는다. 결국 "잠잠하라"는 말은 침묵을 강요하는 억압의 언어가 아니라, 은사와 말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절제와 질서 아래 흐르라는 복음의 언어다.
2장 12절의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려 하지 말라"는 문장도 같은 맥락에서 풀린다. 장재형목사는 금지된 것이 '가르침'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서 벗어난 내용과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방식, 그리고 일방적 지배의 태도라고 설명한다. 바울은 곳곳에서 여성 동역자들을 칭찬하며 함께 복음을 세웠다. 문제는 권위를 휘두르는 방식에 있다. 성경이 말하는 권위는 맡겨진 것이지 빼앗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은 자신을 드러내는 통로가 아니라 성도를 세우는 섬김이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그래서 본문이 막으려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지배'라고 못 박는다. 교회에서 권위는 높아지려는 욕망이 아니라 낮아지려는 책임이고, 가르침은 이기려는 기술이 아니라 살리려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창조 질서를 근거로 드는 13-14절 역시 우열의 논거가 아니라 질서의 논거로 읽어야 한다. "아담이 먼저 지음 받았다"는 언급은 남녀의 등급을 가르는 말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책임과 역할이 서로를 보완하며 서야 한다는 큰 질서를 가리킨다. "여자가 미혹되었다"는 표현도 여성의 본성적 열등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 교회에 퍼진 미성숙하고 검증되지 않은 가르침이 은사의 언어를 타고 예배를 흔들 수 있음을 경계하는 목회적 우려를 담은 말로 이해해야 자연스럽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다른 선언-"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다"-을 함께 제시하며, 창조 질서는 위계의 사다리가 아니라 상호의존의 짜임이고, 교회에서의 권위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의 기회임을 강조한다. 남성은 분노를 내려놓고 화해로 거룩을 입고, 여성은 과시의 무게를 내려놓고 선행과 정절로 자신을 단장할 때, 둘은 경쟁자가 아니라 동역자로서 한 몸을 세운다.
많이 어려워하는 15절,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문장도 행위 구원을 가르치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대표적인 두 흐름을 균형 있게 소개한다. 하나는 정관 표현을 살려 '그 해산', 곧 메시아의 탄생이라는 구속사적 사건을 가리킨다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의 일상적‧관계적 소명을 비유적으로 언급하면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으로, 정절 가운데 거하면"이라는 결론에 초점을 맞추는 해석이다. 어느 쪽이든 핵심은 동일하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주어지며, 그 은혜는 우리를 방종으로 밀어 넣지 않고 사랑과 절제, 화평의 질서로 이끈다. 그러니 디모데전서 2장의 목적은 여성을 제약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녀 모두가 복음의 질서 안에서 은사를 바르게 사용해 교회를 살리게 하려는 데 있다.
이러한 해석은 오늘 교회에 매우 구체적인 길잡이가 된다. 첫째, 여성의 목회 참여와 리더십을 이 본문으로 원천 봉쇄하는 관행은 성경의 의도와 어긋난다. 장재형목사는 성별을 문턱으로 삼지 말고, 남녀를 막론하고 가르치는 자에게 요구되는 인격의 성숙, 정통 교리에 대한 확신, 공동체에 대한 책임, 검증과 감독이라는 기준을 분명히 하자고 말한다. 교회는 은사를 묶어 두는 곳이 아니라 질서 속에서 꽃피우게 하는 곳이어야 한다. 둘째, 예배의 갱신은 프로그램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돌리는 일이다. 남성은 경쟁과 분노의 정서를 회개하고 화해의 손을 내밀고, 여성은 세속적 과시에서 돌아서 하나님 경외와 이웃 사랑이라는 내적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단장할 때 예배의 향기가 짙어진다. 셋째, 은사와 열정은 질서와 분별이라는 강물 안에서 흐를 때 서로를 살린다. 방언, 예언, 가르침, 찬양이 서로를 덮지 않고 서로를 세우도록 지도자는 방향을 제시하고 회중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질서를 기쁘게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품위'이며,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하는 '화평'이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디모데전서 2장에서 꿰뚫어 내는 핵심은 한 문장으로 모일 수 있다. 초점은 차별이 아니라 질서, 억압이 아니라 화평이다. 이 본문은 여성의 입을 막는 글이 아니라, 공동체의 귀를 여는 글이다. 장재형목사는 특정 구절을 떼어 자신의 문화적 선호를 정당화하려는 습관을 경계하고, 본문이 선 자리와 겨냥한 방향, 곧 예배의 질서와 공동체의 유익을 함께 보라고 초대한다. 그래서 여성 목사 안수나 여성 리더십에 관한 논의도 '가능/불가'의 이분법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진 더 본질적인 질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가르침은 진리 위에 서 있는가, 우리의 권위 행사는 섬김과 절제 아래 있는가, 우리의 은사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질서에 기꺼이 순복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정직해질 때 성별 논쟁은 자연스레 본질로 수렴되고, 교회는 차별을 없애려 애쓰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섬김과 질서를 기쁨으로 세우게 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은사를 사용하셔서 몸을 자라게 하시고, 교회는 예배의 고요 속에서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세상 속 사랑과 정의의 실천으로 이어가게 된다. 그 길 위에서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은 오해의 안개를 걷어 내고, 열광이 아닌 질서, 과시가 아닌 선행, 지배가 아닌 섬김으로 디모데전서 2장의 메시지를 오늘의 예배와 사역 속에 살아내도록 우리를 부드럽고 단단하게 이끈다.
















